현관문을 열었을 때부터 평소 저녁하고는 박자가 달랐어요.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을 건너뛴 날이었는데, 볼일까지 길어져서 집에 돌아오니 배가 고프다 못해 속이 텅 빈 느낌이더라고요. 그런데도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발은 방이 아니라 주방으로 먼저 갔답니다.
우리 집은 누가 먼저 먹고 누가 나중에 먹은 날이면 싱크대가 그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줘요. 물컵은 물컵대로, 작은 접시는 작은 접시대로 조금씩 흩어져 있었죠. 거창하게 치울 마음은 없었어요. 일단 수도를 틀고 행주부터 물에 적셨습니다.
이상하게 저는 늦게 들어온 날에도 싱크대 가장자리 물기부터 한 바퀴 닦아요. 밥을 데우기 전에도, 냉장고 문을 열기 전에도요. 손바닥만 한 자리를 슥 닦는다고 집이 말끔해지는 것도 아닌데, 그걸 하고 나면 이제야 제가 주방에 도착한 기분이 들어요. 매일 반복해서 손이 먼저 기억하는 모양이에요.
행주를 헹구는 동안 막내가 물을 찾으러 왔다가 제가 서 있는 걸 보고는 저녁을 또 먹을 수 있느냐고 묻더라고요. 아까 먹었다는 대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죠?! 배고픈 사람 옆에서는 덩달아 입맛이 도는 건지. 찬장에서 컵을 꺼내 주고 나니 제 끼니보다 작은 야식 접시가 먼저 생겼어요.
냉장고에는 아침에 씻어 둔 채소와 전날 남긴 반찬이 있었어요. 늦은 저녁에는 새 냄비를 꺼내는 일도 크게 느껴져서, 있는 것을 한 접시에 조금씩 담아 식탁에 놓았죠. 그때는 금방 치울 생각이었는데 싱크대 물기까지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.
껍질을 벗기니 촘촘한 알이 보여서 괜히 잘 골랐다는 마음이 들었어요. 냄비에 물을 올리고 옥수수를 퐁당 넣은 뒤, 기다리는 동안 남은 그릇을 씻었습니다. 배가 고프면 손도 급해질 법한데 설거지할 때만큼은 평소 순서가 나와요. 컵부터 씻고 접시로 넘어가는 그 순서.
사실 이 순서를 누가 정해 준 적은 없어요. 하루는 컵을 마지막에 씻어 봤다가 기름기 묻은 수세미가 찜찜해서, 그다음부터 자연스럽게 굳어진 것 같아요. 피곤한 날에는 머리로 다음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법 편하답니다. 몸이 알아서 컵을 잡고, 저는 보글보글 올라오는 냄비 소리나 듣고 있고요.
옥수수 냄새가 솔솔 퍼지니 방에 있던 아이들도 한 번씩 주방을 기웃거렸어요. 늦은 시각이라 많이 내놓지는 않고 반씩 잘랐는데, 막상 접시에 담으니 제 몫이 제일 작았습니다. 이건 뭐, 세 아이 있는 집에서 익숙한 계산이죠. 저는 끝부분을 들고 서서 먼저 촵촵 먹었어요.
아침을 거른 뒤 처음 제대로 먹는 것이 옥수수라니 조금 우습기도 했어요. 뜨거운 알을 급히 베어 물다가 입천장이 놀라서 혼자 물컵부터 찾았네요 ㅎ. 그래도 따뜻한 게 들어가니 빈속이 가라앉았고, 그제야 남은 밥도 조금 데워 앉을 마음이 생겼습니다.
밥을 먹고 나면 오늘만큼은 그릇을 그대로 두고 싶을 줄 알았어요. 그런데 접시를 싱크대에 내려놓자 손이 또 행주를 찾더라고요. 수도 주변에 튄 물을 닦고, 접은 행주로 조리대 모서리를 한 번 밀고. 딱 거기까지만 하자고 했는데 냄비 뚜껑까지 닦아 세워 두었습니다.
이런 작은 버릇은 살림을 잘해서라기보다 내일 아침의 저를 너무 잘 알아서 생긴 것 같아요. 눈 뜨자마자 젖은 싱크대를 보면 괜히 하루가 밀린 듯 마음이 바빠지거든요. 반대로 마른 가장자리를 보면 어젯밤의 제가 자리를 조금 남겨 준 느낌이 들어요. 말없이 의자를 빼 둔 것처럼요.
불을 끄기 전에 행주를 탁탁 털어 널었어요. 주방은 완벽하게 치워지지 않았고 식탁 한쪽에는 아직 물컵이 하나 남아 있었지만, 오늘은 그 정도면 됐답니다. 옥수수 냄새가 희미하게 남은 부엌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한동안 들렸어요.